본문 바로가기
Kiri's Diary/키리 이야기

크리스마스 이브의 레슨

by Podo-포도쨈 2018. 12. 25.

오늘 아이 레슨을 갔더니, 어머님께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챙겨주셨다. 와인과 초콜릿! 매번 기념일을 꼭 챙겨주셔서 감사할 따름이다. 매일 틀어박혀 공부만 하느라 날짜 개념도 없이 살았는데, 벌써 크리스마스라니. 올 한해도 이렇게 끝나간다.


오늘 레슨한 아이와는 꽤나 오랜시간을 함께 했다. 언제 처음 만났는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2년은 족히 넘었을 것이다. 작년 말부터 콩쿠르 준비 하면서 우여곡절도 참 많았다. 선생 입장에서 콩쿠르를 준비하는 건 처음이었는데, 이게 보통일이 아닌 것이다. 곡을 바꿔야 하나, 레슨을 그만둘까, 내가 뭘 잘못했을까,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정말. 아이를 어르고 달래고, 혼내고, 또 내가 뭘 어디서부터 잘못한 걸까 참회하는 과정이 반복되었고,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어머님께 최우수상이라는 소식을 듣고는 정말 울 뻔했다.

콩쿠르를 준비하는 동안, 고등학교 때 나를 가르쳐주시던 선생님이 참 많이 생각났다. 실력으로나 인품으로나, 원래부터 존경하던 선생님이었는데, 그런 선생님이 더욱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허접하게 피아노 치는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답 안나오는 나를 대학까지 보내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고뇌와 갈등을 겪으셨을 지, 그 마음이 너무나도 이해가 되어 왠지 찡하기도 하다. 언젠가 다시 봽게되면 나를 포기하지 않아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

레스너를 목표로 하진 않지만, 꾸준히 레슨을 해왔던 사람으로서 생각하는 좋은 선생님의 조건 중 하나는 관계를 잘 맺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공 수업시간에 피아노 교육학을 배우긴 하지만, 이론과 현실의 괴리는 매우 크다. 레슨을 하다보면 엄청나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수직적이든 수평적이든, 친밀하든 거리를 두든, 학생의 성향에 맞추어 관계를 맺고 티칭 전략을 세우는 게 나로서는 쉽지가 않았다. 원체 인간관계에 서툴기도 하고, 무언가에 확신을 잘 갖지 않는 성격이기도 하다. 레슨을 하면 항상 '이게 맞는 건가'하는 생각이 머리 위에서 맴돈다. 그런 의미에서 한결같이 나를 엄하게 이끌어주셨던 선생님이 참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가 없다.

"나가!!!!!!!!!!!!!!!!!!!!" 악보를 던지며 내지르던 선생님의 사자후가 그리워지는 날다.

'Kiri's Diary > 키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0403.2020  (0) 2020.04.03
소중해, 내 모든 순간  (0) 2020.02.28
오랜만에 해리포뤄  (0) 2019.12.28
한심한 나레기  (0) 2019.03.02
시작  (0) 2018.12.15